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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박 아니시야, 혹은 해방과 탄압의 변증법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6. 8. 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나는 그녀의 문서 파일을 열어 봅니다. 박 아니시야, 1898년생, 농민 출신, 러시아 보통학교 졸업, 러어 구사력은 약함, 니콜스크-우쑤리스크 여성부 (zhenotdel) 부장으로 활약, 비당원1923, 연해주 재러 동포 출신의 박 아니시야 다닐로브나라는 젋은 여성이 생판 몰랐던 대도시 모스크바에 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 수속을 밟았을 때에, 그녀의 신상 정보는 이렇게 적히게 됐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국내외 민족 간부양성소이었습니다. 대체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청년단 등 같은 조직이나 해외 공산당, 공산 그룹 활동을 해야 추천이 되어 입학이 가능했던 특수 학교였죠. 비당원인 박 아니시야를 연해주 지역당이 그래도 추천하여 모스크바로 파견해 입학시킨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조선 여성을 상대로 한 그녀의 활약이 평가를 받은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선의 붉은 페미니스크, 박 아니시야는 이렇게 해서 3년간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이론 등을 학습하게 됐습니다.

그녀의 모스크바 나날들은 어땠을까요? 35세에 정치범이 되고 39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녀의 회고록이나 편지 등은 남아 있지 않아 오로지 학교측의 «평정서»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가 보기에는 그녀의 동기부여나 출석은 평균 이상이었지만, 성적은 평균 수준이었습니다. 그녀는 공부에 관심이 많아도 정치문제에 이해력도 관심도 없었다는 것은 학교 측의 그녀에 대한 시각이었습니다. 학교 측의 이 문서들을 보면 집안이 가난해 일찍 공부하지 못했는데 배움에 갈증이 나서 드디어 모스크바에 가서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이 조선 여성의 모습은 눈에 선히 보입니다.

정치, 즉 조선 공산당의 건당 등은 그녀에게는 부차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공부와 여성문제에 주요 관심이 갔습니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개인 생활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모스크바에 혁명을 공부하러 온 유생 출신의 조선 공산주의자, 김규열 (1893-1934)과 사랑에 빠져 커플이 됐습니다. 졸업할 때쯤 됐을 때에 학교측은 그녀에게 연해주 조선 여성들을 상대로 하는 일을 배정하려 했지만, 그녀와 김규열은 자의로 조선으로 갔습니다. 김규열은 공산운동을 하러 간 것이고, 박 아니시야는 박신우라는 조선 이름으로 근우회의 열성적 간부가 됐습니다.

조상의 땅인 조선에 처음으로 온 그녀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40명의 근우회 발기인 중 한 명이었고, 1927527일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뽑힌 21명의 집행위원 중의 한 명이 되었고, 창립 직후 처음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7명의 상무집행위원 중의 한 명이 선임됐습니다. 그녀는 활동, 행사 계획력도 발휘하고, 강연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평양, 전주, 목포, 담양, 수원.. 그야말로 사방으로 열심히 계몽 강의 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남편은 서울상해파(서상파) 입장에 서서 공산당 조직 활동을 열심히 하고, 심지어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6차 대회에 방청객으로 갈 정도로 신망이 높았습니다. 한데 당에 대한 일제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결국 1928년경에 다시 그녀의 고향인 연해주로 넘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거기에서 안식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질환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치료를 받을 만한 돈이 없었고 «무산자들의 조국» 소련에서 무상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무상 의료 혜택 역시 사실이었지만, 그 혜택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당의 일로 공사다망하고, 그녀는 처음 마땅한 직장이 없어 단추 공장에서 직공으로라도 취직해야 했습니다. 한데 활동에 대한 그녀의 취향은 거기에서도 발휘됐습니다. 노조 일을 하게 되고, 노조 활동가를 위한 무료 야간 과정에 다니기 시작하고, 졸업 이후 봉직공장에서 문화부 부장으로 취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간단치 않았지만, 그녀는 소수자 (여성, 소수 종족 출신)로서의 혜택을 받으면서 점차 다시 소련 생활에 적응하게 된 것이죠.

급기야 19323월부터 남편 김규열이 모스크바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외국인노동자 출판부 조선과에서의 일자리를 얻어 둘이 같이 모스크바로 상경할 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남편은 고급 전문가 대우를 받아 그 임금으로는 두 사람이 넉넉히 살 수 있었습니다. 박 아니시야의 새 직장 구하기도 급하지 않았습니다. 아파트까지 무상 배정됐습니다. «최초의 노동자와 농민 국가»에서의 수도에서 이제 꿈 같은 삶을 살게 된 셈이죠?

유토피아는 몇 개월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19331123일에 박 아니시야와 그 남편은 돌연히 비밀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시절에 박 아니시야가 하도 불쌍해 보여서 집에서 몇 개월 숙식하게 해준 김중한이라는 조선인이었습니다. 한 때에 박열의 친구이자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던 그는, 결국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일경의 검거선풍을 피해 역시 소련으로 망명했습니다. 한데, 소련 비밀 경찰이 보기에는 그는 참 수상한 사람이었습니다.

허가 없이 국경을 몇 번 넘나들고, 계속 일본, 그리고 조선 내지와 사적으로 연락을 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의 사전 허가도 없이 당재건 준비그룹을 만들어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고, 계속 조선과 간도에 남은 상해파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던 남편 김규열 역시 수상해 보였습니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비주류 정파인 상해파는 처음부터 소련 비밀 경찰들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구석이 있었지만, 1932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이 성립된 뒤로는 간도에서 그 세가 상당했던 이 파벌은 의문도 아닌 수사의 대상에 올랐습니다.

총력전을 점차 준비하면서 총동원 태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소련으로서는, 서상파 같이 국제적 연락망을 가지고 월경적인 행동반경을 지녔던 비주류 소수자 정치 활동가들은 이제 혜택줄 대상이 아니고 제거해야 할 위협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의 문서를 이제 접할 수 있는 우리들은, 김중한도 김규열도 밀정이 아닌 독립 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한데 소-일 관계가 긴장의 도를 높여가는 1933년의 피해망상증적 분위기에서는, 김규열과 그 부인의 유죄 판결 만들기 위해서는 확증 따위 필요도 없었습니다.

상황적 증거심증으로 충분했습니다. 김규열이 «양반 출신»이라는 불리한 점을 지닌 것도 참고됐습니다. 빈농과 다를 게 없는 몰락 양반이었지만, 어쨌든 비밀 경찰들은 그를 «이류 분자»로 분류하게 된 것이죠. 그는 1934년초에 사형이 집행돼 한 많은 삶을 마감하게 됐습니다. 그의 부인 박 아니시야는 일단 목숨을 부지해 5년 징역형만 받았습니다. 공산대학의 졸업생이자 국가의 일선 간부였던 그녀는, 한 순간에 교화소의 수인 신세가 됐습니다. 소수자 출신 여성 활동가에게 혜택을 계속 주었던 국가는, 이제 감시와 처벌을 내리는 모습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녀가 관노비 처지와 같은 교화소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료는 없습니다. 그 삶 같지도 않은 삶은 3년 지속되고, 1937년에 그 징역형을 다 살지도 못한 박 아니시야는 다시 사형 언도를 받아 총살됐습니다. 그녀에게는 자녀도 아카이브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묻혀버린 삶이 된 것이죠. 남은 것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측의 문서와 비밀경찰 수사 기록, 그리고 근우회 활동 관련의 일부 기록들입니다. 이런 삶에 대해서야말로 «억울하다»는 형용사는 딱 어울릴 것입니다.

믿고 따르고 사랑했던 «노동자 국가»로부터 결국 징역과 총살을 맞게 된 박 아니시야의 한은 어느 정도였을까, 싶습니다. 그녀는 교화소 삶을 살면서 어쩌면 공산대학에서 학습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갖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이 갑니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면 그 어떤 대상도 결국 양극의 합이고 그 양극이 계속 모순을 빚고 투쟁하면서도 상호 침윤하고 융합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녀에게 각종 혜택을 주다가 결국 수용소 밥과 총탄을 준 이 «노동자 국가» 역시 어떻게 보면 양극의 합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혁명 이후에 성립된, 소수자를 위한 역차별 정책 등을 실시하는 «진보적 국가»였지만, 동시에 제정 러시아의 전제정을 계속 이어 1930년대에 접어들어 군국으로 발전된 무시무시한 제국이기도 했습니다. ‘혁명 국’'에게는 박 아니시야 같은 소수자들은 해방 대상이었지만 제국으로서는 그들은 불신, 감시, 처벌의 대상이었습니다. 한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이제 와서 사후적으로 차분히 할 수 있지만, ‘해방탄압을 계속 이어서 받아야 했던 그 당시 당사자들의 «체감»이 어땠는지 우리로서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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