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한빈의 존재를, 처음으로는 임은, 즉 허진 선생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김일성정전>에서 알았습니다. 탈스탈린화를 주장하여 1958년 소련에 망명한 북조선 유학생 출신의 허진 선생은, 본인도 해방 직후의 북한을 체험했지만 거기에다가 파북 고려인들을 널리 인터뷰하여 북한 초기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아 책을 쓴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연안파'를 소개하면서 서열 5위로, 즉 무정 장군과 김두봉 조선독립동맹 위원장, 박일우 조선의용군 정치위원, 최창익 조선독립동맹 부위원장 바로 다음으로 한빈, 즉 미하일 한을 열거한 것이었습니다. 이 유명 지도자들과 함께 같은 반열에 서게 된 이 한빈이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저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조선 이름 '한빈'에다가 '미하일 한'이라는 고려인과 같은 이름을 가졌음에도, 파북 고려인들은 그를 자파 인물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출생지도, 자료마다 조선 (함북 경원 내지 명천 등)과 간도지방, 그리고 연해주로 각각 달리 나와 있었습니다. 도대체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연안파의 지도자인 한빈이 누구인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저를 옛날에 가르쳤던 안드레이 란코브의 북한사 관련 책에서 한빈이 1920년대 중반 코민테른의 허가 없이 자의적으로 연해주를 떠나 만주로 간 일로 러시아 공청에서 제명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더욱더 궁금증을 북돋우고 있었습니다. 연해주와 조선, 그리고 간도 사이의 국경을 계속 넘고 넘었던 이 월경하는 공산주의자가 누구였는지,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일단 코민테른 자료를 보면서 이 궁금증을 다행히도 풀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일본 관헌의 자료를 추가하면 한빈이라는, 국경과 국적을 초월했던 혁명자의 삶의 궤도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40년 정도의 그의 혁명 일생은, 연해주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간도, 남한, 그리고 북한을 같이 아우릅니다. 지리적으로도 폭이 넓지만, 신생 국가 소련의 열성적인 소수민족 간부로 출발하여 북한 숙청의 희생자로 끝난 그의 삶 속에서 20세기 사회주의적 실험의 그 모든 명암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북한 정권에서 한 자리를 한 만큼 한국에서 서훈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한국인들이 정말 알아야 할 20세기 한국사의 한 주인공이라고 봅니다.
그가 조선에서 태어나 유아 시절에 러시아로 가족과 함께 이동한 건지 모르지만, 일단 러시아 문서에서는 출생지는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군 민스카야면, 슬라뱐카촌으로 돼 있습니다. 그 마을에서 러시아 학교를 나오고 니콜스크에서 고교를 졸업한 만큼, 러어를 모어 정도로 구사했다고 봐야 합니다. 한데 조선에서의 활동에 제한이 없을 만큼 조선어는 모어이었을 터인데, 거의 완벽한 이중언어 화자의 경우죠. 1902년4월28일생으로, 1920년에 러시아 공청, 즉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거기에서 시당 선전부 부장, 면당 지도원, 그리고 면당 조선과 과장 등 몇 개의 보직을 겸직한 것입니다.
거기에다 니콜스크 시 소비에트 (시의회) 의원과 현물세 납부 지도원 등 온갖 다른 보직까지 다 자임한 걸로 보니 혁명을 너무나 열성적으로 맞이한 소수자 출신의 인테리랄까, 이런 인상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는데, 그가 혁명국가에서 교육을 받아 간부가 될 것을, 아마도 가족과 측근들이 은근히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벼슬'보다 '혁명' 그 자체는 훨씬 중요했습니다.
그의 젊은 열성이 당에서 평가를 받아, 그는 1923년에 민족 간부 양성소 격인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파견됩니다. 한데 거기에서는 그가 1년 정도만 수학하여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납니다. 18만 명의 고려인을 '관리'하면서 그들의 고충을 처리하고 그들에게 '당적 교양'을 주고 그들을 당과 국가 앞에 대표해줄 민족 간부들은 일단 연해주에서 너무나 절실히 필요했기에 긴 학업 기간을 허락해 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에 시 정치-문화과에서 일하면서 공청 일도 보고 조선 국내 공산당을 조직해야 할 코르뷰로에도 관여하지만, 시당의 고려인 실력자였던 이영선과의 불화로 곧 시골 학교 선생으로 좌천됩니다.
이렇듯 개인 사이의 후견-피후견 관계, '연줄' 등으로 점철된 관료 생활에 주눅이 들고 '혁명 현장'의 맛을 보고 싶어했던 그는, 모든 것을 다 뿌리쳐 그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1925년에 중국 동북 지방, 영고탑으로 갑니다. 이 일로 그는 연해주 공청에서 제명 처리가 됐지만, 그로서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박윤세 등의 지기들과 함께 그가 고려공청의 만주총국을 책임을 집니다. 조선보다 공산주의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비교적 더 좋았던 중국 동북지방은, 그 당시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한데 그는 그 운동을 만주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1926년초에 그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울로 잠입하고, 거기에서 조선공산당과 공청 운동에 참여하면서 거기에서 서울파와 화요계의 대립을 지켜보면서 "파벌 청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집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파벌 청산, 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 'ML'그룹의 한 명의 창립 멤버가 되는 것입니다. 한데 6.10 운동 이후 검거 선풍이 극심했던 서울에서는 그가 안전할 수가 없어, 결국 1926년말에 그는 연해주를 거쳐 다시 모스크바로 갑니다. 1926년12월부터 시작해서 그가 코민테른의 조-러 통변역이 되어 조선 공산주의자와 코민테른 사이의 "소통"을 담당합니다.
동시에 그는 '공부'에 대한 꿈을 결코 접을 수 없어 1927년5월부터 레닌그라드대학의 법학부에서 공부했다가 1928년에 모스크바대 법학부로 전학합니다. 소련의 "최고 학부"인 모스크바대에서 수학한 조선인들은 그 당시에 대단히 드물었는데, 한빈은 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1928년가을에 그는 양명 등 ML계열의 지도자와 함께 코민테른을 상대로 조선 공산당의 '2월당'의 적법성을 주장하는데, 결국 코민테른은 김단야 등의 안을 받아들여 서울파 중심의 '12월당'도 ML계열 중심의 '2월당'도 불인정하여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와 재건의 길을 택합니다.
한빈은 그 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1929년 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기반으로 삼아 길림 등지로 나들이하면서 'ML'파 당 재건 운동을 지휘합니다. 결국 1930년 봄에 그는 간도를 거쳐서 서울을 향해 밀입국합니다. 그 뒤로는 그는 소련으로 결코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서울에서는 박민영 (니키포르 박)과 권오직, 조두원, 김응기 등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여러 출신들이 당재건 운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그들에 대한 일경의 추적 역시 맹렬했습니다. 일단 일경의 주목을 피하여 여태까지 본격적으로 해보지 못한 조선 내지에서의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빈은 가회동 208번지의 자신의 아지트를 떠나 부산으로 갑니다. 한데 부산에서 1930년3월15일에 일경이 그를 체포하고 맙니다.
그 당시에 조선에서 지하 사업을 했던 코민테른 대표자들 중에서는 박민영과 김정하는 운좋게 일경을 피해 소련으로 돌아가고, 박민영은 코민테른에게의 보고서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지하 작업 미숙성"을 한탄합니다. 아무래도 그 감시망이 치밀했던 일경은,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한빈은 1930-6년, 일제의 감옥에서 과연 어떻게 지냈을까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는데, 일단 감옥에서도 저항을 계속 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입옥돼 있었던 동지들의 투지 역시 꺾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1932년7월8일, 일군의 공산주의자 수인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대전 형무소로 이감해야 됐습니다. 대전 형무소에서 수인들이 넘쳐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열차에서 그 날 11시53분에 내리고 대전역에서 형무소로 가는 중 춘일정 (오늘날 중동, 은행동, 선화동 등)을 지나 대전교라는 다리를 건너가고 나서는, 그 중의 한 명인 최익한 (1897-?)은 돌연히 선창 (先唱)에 나섰습니다:
높이 들어라 붉은 기발을
그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
한빈을 포함한 조두원과 김응기, 권오직 등 같이 수감돼 있었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들은, 최익한의 선창에 같이 응하여 대전의 거리에서 적기가를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한빈으로서는 최익한은 같은 ML계열의 동지이기도 하여 그 우정은 특히 깊었을 것입니다. 다산학의 대가이기도 한 최익한은, 해방 이후 평양에서 김일성대학의 교수가 되고 한빈은 같은 시기에 그 대학의 부총장이 될 것인데, 둘은 아직은 이걸 당연히 예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혁명 가요를 소리 높이 불러 그 기개 (氣槪)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이었죠. 그 일로 한빈은 추가로 8개월 징역형을 더 받았습니다.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감옥에서든 감옥을 나오든 일제와의 사투에 평생을 바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1936년, 한빈은 만기 출옥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공산당 서울파 출신의 최창익, 그리고 그 파트너 허정숙 등과 함께 바로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소련 영토로 돌아가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소련에서 보직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그에게 항일 혁명은 더 일차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스탈린 대숙청 (1937-38년)을 앞두고 그가 소련으로 가지 않았다는 건, 그의 목숨을 살린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련에서의 숙청 시기를 잘 넘어갔지만, 결국 평양에서의 숙청 시기를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한데 그건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중국의 그 당시 수도였던 남경에서는, 한빈은 소련 대사를 찾아가서 조선 공산당 재건의 길을 논의하는 데에 나섰습니다. 한데 대사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 당시 소련의 입장에서는, 일국일당 (一國一黨)의 원리대로 재중국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아 활약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일단 항일 운동 차원에서 통일전선 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 논리대로 한빈과 허정숙, 그리고 최창익은 약산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습니다. 좌파 민족주의 계열의 이 정당 안에서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민족 해방에 같이 노력을 하고, 중국의 항일 노력과 보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한빈의 중국 망명은 딱 제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1937년7월7일에 일본의 중국 관내 영역 공격이 개시되어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됐습니다. 다급해진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37년9월에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조선인 특별반을 만들어 조선 망명 청년들에게 군사 교육을 실시키로 했습니다. 강서성 성자현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나중에 유명 작가가 된 김학철을 포함한 약 100여명의 조선 청년들은 중국 청년들과 함께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에게 한빈은 정치경제학 (사실 세계공산주의운동사)을 가르치게 됐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에서 배운 지식을, 이렇게 중국 군사 학교에서 활용하게 된 것이죠. 좌우 양쪽의 통일전선이 시대적 화두인지라, 민혁당 중심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1937년12월에 건설되고, 한빈은 거기에서 정치부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한데 중국 측에서도 조선 측에서도 좌우 합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보수적 민족주의자들도 1940년에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지만, 결국 민혁당 내에서의 사회주의자들도 독립적 세력화의 길을 나서게 됐습니다. 1940년 여름, 한빈 등은 민혁당을 탈당하여 낙양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따로 차립니다.
좌파의 무력은 바로 공산 계열의 간부들이 지휘했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였습니다. 한빈은 그들과 함께 북상하여 중국 공산당 유격대가 저항하고 있는 태항산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조선의용대간부훈련반 (향후의 조선청년혁명학교 )의 교사로서 활동하는 한편, 조선의용대의 정치조직이었던 화북조선독립동맹 (1942년 결성)의 부주석이 됩니다. 최창익, 이상조, 김두봉 등과 함께 활약하면서 유격대 투쟁에 참여하는 한편 해방 이후를 미리 생각해서 경성에 있는 여운형에게 연락원을 보내 일제 패망 이후의 ‘건국’까지 염두에 두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해방과 건국의 순간은 왔지만, 한빈이 생각했던 것과 그 현실은 사뭇 달랐습니다. 만주와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은, 조선의용대를 먼저 무장해제시킨 다음에 북조선에의 그 입국을 허가했습니다. 소련군의 군정이었기에, 일단 소련군에 편입돼 있었던 김일성의 88독립특별여단 출신과 소련에서 직파된 고려인, 그리고 조선 내지에서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였던 국내파 위주로 북조선의 정계가 조직돼 갔습니다. 한빈은 본래 고려인 출신이었지만, 입북 당시에는 이미 고려인이 아닌 ‘연안파’, 즉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아 중국 관내에서 투쟁해서 온 정치인으로 분류됐습니다.
연안파는 새로운 질서의 ‘주’보다 ‘객’에 더 가까웠습니다. 최창익, 김두봉, 한빈은 공산당도 아닌 조선신민당으로 갔습니다. 그 임무는 좌파와 무당파 등, 공산당에 친화적이지만 딱히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을 흡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신민당은 1946년에 조선노동당에 합류했지만, 한빈은 노동당의 중앙위 서열에서 한참 밀렸습니다. 북한 정치계를 쥐락펴락했던 소련 군정 관리자들의 입장에서는, 소련 군복을 갓 벗었던 김일성에 비해서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소련의 ‘관리’를 받지 않고 독자 행동해온 한빈 같은 인사들은 버겁고 부담스러웠습니다. 모국어 수준의 한빈의 러어 구사마저도 별 도움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건국 집단에서는 한빈은 보기 드문 모스크바 국립대, 즉 소련 최고 학부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는 학적인 임무들이 종종 맡겨졌습니다. 1946년10월에 김일성대학이 창설되자 한빈은 거기에서 부총장직을 맡았습니다. 그 때 그에게 가장 가까웠던 벗 중의 한 명은 한 때에 중국에서 그의 수강생이었던 김학철이었습니다. 김학철이 나중에 회고록에서 밝혀낸 그들의 대화 내용을 보면 한빈도 김학철도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이상에 충실했지만, 소련 군정과 김일성 위주의 새로운 질서에 상당한 저항감을 느꼈던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빈이 1930년에 소련을 영원히 떠난 뒤의 소련의 모습만 해도 그가 생각했던 ‘사회주의’와 이미 한참 거리가 멀었지만, 한빈은 그 당시에 그것을 충분히 알았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총장직에서 물러난 한빈은 결국 평양의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갔습니다. 그 직에 1954년까지 있었는지 아니면 1956년 종파 사건 이후 최창익 등과 함께 숙청됐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김학철이 그가 1954년에 소련으로 추방됐다고 적었지만, 소련 문서에서는 해당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결국 1950년대 중후반 쯤에 북한의 통치층에서 탈락됐다는 사실입니다.
진지한 혁명가였던 그는, ‘적색 개발주의’의 명령-복종식 관료 체제에 그 성격상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관료 세계의 내부 투쟁에서 도태되기가 쉬웠던 것입니다. 그는 소련과 중국, 조선에서 국경을 넘어가면서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민족 해방 대신에 분단 질서가 성립되고, 계급 해방 대신에 분단 체제 안에서는 북에서 새로운 계급적 서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옛 혁명가들이 그 새 현실에 적응하거나 탈락되는 길 밖에 없었는데, 한빈은 탈락돼 사라졌습니다. 일단 스스로의 꿈을 접고 새로운 «수령님»을 평생 모시는 것보다 어쩌면 더 다행스러운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사 등록 202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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