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정성진 교수에 대한 노동자연대 이정구 동지의 비판글(http://wspaper.org/article/18693)을 읽으면서 안타깝고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누군가의 의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언제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정구 동지의 글은 앞부분과 결론에서 단지 정치적 비판을 넘어선 날선 언어와 표현으로 정성진 교수를 비난하고 있다.
제목부터 “우경화”라며 매도하고 있고 “최종 전향”, “이론적 논의만 일삼은 한 책상물림”, “진정한 학술주의자”, “개혁주의자”같은 딱지를 붙여대고 있다. “혹시 자유주의자나 심지어 우익으로까지 변하랴”하는 비아냥까지 덧붙였다. 거의 인신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다.
정성진 교수가 “계급투쟁과 거리를 둔 채 순전한 이론적 논의만 일삼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도 아니다. 물론 정성진 교수는 사회운동에 투신한 활동가는 아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연구>,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대학원 정치경제학과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교육의 제도화에 힘썼다.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와 출판 등에 기여했고, 현실 투쟁과 연관된 글이나 칼럼 등도 써 왔다. 당장 이번 이정구 동지가 비판한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글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적 논의’가 아니었다.
정성진 교수는 이명박근혜 시대에 각종 반동적 정책에 반대하는 기자회견과 성명에도 자주 이름을 올린 실천적 지식인이었고, 재능교육 투쟁 현장에서 강연을 한다거나 국가보안법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 탄압받는 활동가를 방어했던 것도 기억난다.
무엇보다 최근까지 노동자연대 동지 자신들도 매년 자신들의 맑시즘 행사에 고정 연사로 초청해 왔던 사람을 “책상물림”이라고 모욕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정성진 교수가 3년전 노동자연대에서 내가 몇 가지 이견 제시로 징계를 받을 때, 방어 서명을 해줬던 것도 이 상황에 영향을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이미 노동자연대 동지들로부터 ‘개혁주의, 기회주의, 민중주의’ 등 온갖 딱지가 붙고 가슴 아픈 말들을 많이 들었으며 그것이 책 두 권으로까지 묶어 나왔지만, 이제 더 많은 사람에게 그런 공격이 확대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이런 태도가 노동자연대 안팎에서 토론을 뒤틀리게 하고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 노선과 해석만 고집하며, 그것에 어긋나는 주장을 펴면 매도를 당하는 분위기에서는 건설적인 토론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레닌주의’를 신성불가침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이견을 제시했다가는 ‘정통’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몰릴 것이 걱정 될테니 말이다. 사실 이것은 많은 급진좌파가 빠져들었던 막다른 골목이기도 하다. 당장 볼셰비키가 그랬다.
물론 볼셰비키는 짜르의 탄압을 이겨내며 헌신적으로 활동한 투사들이었고,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교훈을 남긴 선배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볼셰비키는 1917년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요구와 정서를 누구보다 잘 대변하며 거기서 배우려고 한 혁명가들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볼셰비키는 길을 잃어 갔다.
한때 볼셰비키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던 빅토르 세르주는 이렇게 돌아 본다. “볼세비키는 자신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신했고 다른 생각은 반동적이라고 보면서 이단 심문관처럼 변해 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권위주의가 탄생했다.” 그런 권위주의는 스탈린주의로 이어졌다. 그런데 스탈린의 박해를 당하며 추방당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 속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났다는 게 세르주의 탄식이다.
“트로츠키주의 저널들은 나의 반론과 정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박해자들의 태도와 똑같았다. … 그들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다 가루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얄궂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나는 이 모든 사태에 가슴이 미어졌다. … 제4인터내셔널의 서클들에서는 트로츠키의 입장에 반대하면 누구든 쫓겨났다. 소련의 관료들이 우리를 겨냥해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언어로 비난이 퍼부어졌음은 물론이다. … 그는 자신의 정설에 사로잡혔다.” (빅토르 세르주, <한 혁명가의 회고록>)
이처럼 생산적 토론을 가로막는 비판의 태도와 방식을 넘어서, 정성진 교수에 대한 이정구 동지의 비판 내용을 보자. 그러면 일부 일리있는 지적들도 담고 있다. 사실 나도 정성진 교수의 주장에 이정구 동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몇 가지 이견도 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론’을 또 다른 정설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라거나, 1914년 이후 레닌과 카우츠키의 단절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 등이 그렇다. 하지만, 그 핵심 내용에서 정성진 교수에 대한 이정구 동지의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정구 동지는 정성진 교수가 “레닌주의를 공개적으로 포기”했다고 질타하면서, “그 귀결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좌파적?) 개혁주의”라고 단정하는데 설득력도 근거도 없다. 왜냐하면 정성진 교수는 레닌주의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하나씩 논박하면서 오히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공산주의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레닌주의에서 벗어나면 개량’이라는 식으로 딱지붙이며, 제시하는 근거는 “일찍이 20여 년 전부터 그의 글에서 힐끗힐끗 비치듯이 선보였던 것”이라는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 씨”의 “귀뜸”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한 개인적 “귀뜸”이 공식적인 비판의 근거가 된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 정성진 교수의 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근거와 설득력이 있다. 이정구 동지는 정성진 교수가 “레닌의 전체적 사상과 특별한 강조에 모두 유념하는 것이 아니라 레닌 말들의 파편을 거두절미 식으로 짜깁기해 비판”했다고 했다. 하지만, 레닌의 주장을 단편적으로 가져와서 주장을 펴는 것은 정작 이정구 동지 자신이다.
누군가의 사상을 평가하려면 그가 특정 시기에 내놓은 일반적이고 듣기 좋은 말들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의 생각의 흐름과 변화, 무엇보다 실천을 종합해서 봐야 한다. 그렇게 볼 때 레닌의 실천과 사상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핵심적 지적들은 타당하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첫째, “레닌이 노동자계급의 자기활동, 자기조직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개념을 일관되게 견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정성진 교수의 주장을 보자. 정성진 교수는 카우츠키의 영향력이 뚜렷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의 관점이 명백히 ‘아래로부터 사회주의’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노동자들 외부로부터만 도입될 수 있다. …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노력만으로는, 단지 노동조합 의식만을 발전시킬 수 있다. … 사회주의의 이론은 … 교육받은 유산 계급의 대표자들, 지식인들이 정교화한 철학, 역사 및 경제이론으로부터 생겨났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이정구 동지는 레닌의 생각이 변했다는 근거로 <국가와 혁명>을 제시하거나, 레닌이 말한 “위로부터”는 “혁명적 지도”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한다. 물론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이상주의가 잘 나타난 저작이다. 하지만 <국가와 혁명>은 1917년 혁명이 지나고 나서 출판됐을 뿐 아니라, 1920년에 레닌 자신이 ‘동화 속의 이야기’라며 그 의미를 깍아내린 저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변화한 주장을 실천과 종합하면서 검토해야 한다.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험대에서 레닌이 진정으로 아래로부터 피억압자들 스스로의 조직과 행동, 민주적 토론과 판단을 가장 중요시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1917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의 자치조직은 소비에트였다. 그런데 당장 레닌은 가장 저돌적으로 소비에트의 민주적 승인없이 10월 봉기를 추진한 장본인이다. 정성진 교수는 바로 그것을 지적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대회를 기다릴 수 없다. 볼셰비키는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 지체는 범죄이다. 소비에트대회를 기다리는 것은 형식성으로 아이들 장난하는 것이며, 부끄러운 형식성 놀음이며, 혁명을 배반하는 것이다.”
물론 이정구 동지의 지적처럼 결과적으로 봉기는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가 주도했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형식적으로는 소비에트 산하였지만 내용적으로 군사혁명위원회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기구였다. 둘째, 군사혁명위원회의 병사들 다수는 자신들이 참가하고 있는 게 무장봉기라는 것을 몰랐다.
셋째, 군사혁명위원회의 행동은 소비에트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라, 봉기 이후에 사실을 알게 된 소비에트의 사후 승인을 받았다. 넷째, 사후승인마저도 소비에트에서 상당수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항의 퇴장한 상황에서 얻어낸 것이다. 다섯째, 그 소비에트마저도 여전히 지방의 수많은 농민들을 포괄하지 못한 상태였다.
절박한 혁명적 상황에서 민주적 토론과 주체적 참여가 잘 되기는 어렵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중에라도 소비에트에서 다수의 동의와 지지, 동참을 얻어내기 위한 설득과 노력이 있어야 했다. 더 많은 지방의 농민들을 소비에트로 끌어들여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퇴장하자 곧바로 권력 독점에 나선다. 볼셰비키가 장악한 소비에트 집행위에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좌파 야당의 신문은 검열받았고 당원들은 체포됐다. 이에 대해 특히 지방에서는 큰 반발과 충돌들이 벌어졌다.
결국 이 모든 상황전개는 레닌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보았는지 말해 준다. 아직 충분히 준비·설득되지 않은 노동대중을 소수의 단호한 혁명가들이 대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을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식화와 비교해 보라.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둘째, “일국사회주의론은 스탈린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1915~17년 레닌에 의해 이미 정식화되었다”는 정성진 교수의 지적을 살펴보자. 스탈린이 주장한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말이 사실은 레닌이 이미 1915년에 한 말이라는 것이다.
이정구 동지는 레닌이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강조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이를 논박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문구에 얽매이는 게 아니다. 스탈린조차 혁명의 국제적 확산과 국제주의를 강조한 수많은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실제로 레닌이 스탈린에 앞서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경쟁과 축적, 이것을 더 효과적으로 할 독재적 권력의 강화를 추진했느냐 여부이다. 여기서도 구체적 상황에서 레닌의 말과 행동을 종합해서 볼 때 그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물론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노동자 생산관리’ 포고령 등 아래로부터 요구를 반영한 의미있는 포고령들을 내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3~4개월만에 종이조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8년 1월부터 공장위원회는 사실상 해체의 압력에 놓여졌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규율을 부과하고 생산성 증진을 강요하며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가하는 기구로 변화해 갔다. 작업반장을 선출하던 관행도 점차 사라졌다.
1919년부터는 여성, 아동노동에 대한 보호들이 폐지되고, 야간노동과 초과노동이 합법화됐다. 12시간 노동제가 도입되고 강제노동 징집이 시행됐다.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불평등한 성과배급제가 도입됐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런 조치들을 앞장서 정당화했다.
“노동자들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 이익을 희생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트로츠키), “우리의 과제는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를 학습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 야만주의와 투쟁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야만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레닌)
이것은 사기저하된 노동자들이 엄혹한 상황에서 불가피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채택한 노선이고 볼셰비키는 그것을 따라간 것일까? 노동자들은 이것에 반대,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앞장서서 채택한 노선이고, 아래로부터 반대와 저항이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그것을 억누르고 추진했다.
예컨대 평등한 배급을 요구하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구속·처벌됐다. 권력에서 배제된 야당이기에, 당시 노동자들의 반대와 저항은 주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의해 대변됐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1918년부터 소비에트에서 이들을 밀어내갔다.
소비에트 선거 자체도 제도적으로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설계됐다. 도시 노동자에게 더 인기있는 볼셰비키가 더 많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도시에서는 2만5천명당 1명, 농촌에서는 12만5천명 당 1명의 대표자를 뽑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에게서 투표권과 참정권을 박탈했다.
그럼에도 노동자·농민들 내에서 불만과 분노가 거세지면서 소비에트 선거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파가 될 가능성이 갈수록 커졌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면 얼마 안가서 그들은 불법화되고 입후보 자체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내전 말기의 수많은 반란에서 ‘자유선거’와 ‘소비에트 민주주의 부활’ 요구가 터져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소비에트는 노동자·농민의 아래로부터 요구와 의견이 분출하는 민주적 자치기구로서 성격이 사라져 갔다. 모든 결정권을 볼셰비키로만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독점했고, 인민위원회는 소비에트에 보고하거나 승인받지 않고 법령을 공표했고, 지방소비에트는 중앙소비에트가 하달한 명령을 집행하는 기구로 성격이 변해갔다.
셋째, 정성진 교수는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자원은 레닌의 모순적 사회주의 개념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1991년 이후 스탈린주의, ‘역사적 공산주의’의 파산은 … 레닌의 사회주의론의 한계를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즉 일부 급진좌파들이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단절성을 강조해 왔다면, 그 연속성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대변한다고 가정된 당이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사상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파괴, 노동자 희생 등은 부수적 피해로 간주되고,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계몽돼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명백히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대치된다.
스탈린 자신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는 온갖 메마른 말과 글을 남겨놓았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막상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1917년에 권력을 잡고나서 이미 같은 취지의 말과 글을 무수히 내놓았다는 것을 잘 보지 않는다. 이것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고 정당화하며 이론적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는 것에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이 당시 레닌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불신했다. “너무나 분열되고 타락하고 부분적으로 부패해 있어서 …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포함하는 조직으로는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행할 수 없다. 그것은 전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1920)
이에 따라서 레닌은 “자주관리는 환상이고 유해하다. 과도기에는 1인경영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했고,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헛소리들은 쓸어버려야 한다”(1920)거나 “반대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1921)고 주장했다.
“공장 경영자의 뜻에 대중의 무조건적 복종이 요구된다. 독재자가 노동계급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게 레닌의 생각이었다. “강철같은 독재없이는 소비에트 지배는 유지될 수 없다. 노동자 독재는 당 독재일 수 밖에 없다.”(지노비에프), “총검은 공산주의를 도입하는 데 필수품이다”(칼 라덱) 등의 주장도 이 시기에 나왔다.
트로츠키가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등에서 내놓은 말들도 분명했다.
“우리는 인간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칸트적, 종교적, 채식주의적 지껄임에 관심없다. 문제는 피와 강철로만 해결될 수 있다.” “불꽃이 꺼지기 전에 가장 밝듯이 국가는 소멸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가장 무자비한 형태를 거친다.” “당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위한 역사적 도구이므로 항상 옳고 누구도 당에 대항해서 옳을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황과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히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이 주장들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파괴됐고 1인경영이 도입됐다. 반대당만 금지한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당 안에서도 지도부에 이견을 제시하는 분파는 금지됐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는 해고되고 배급권이 몰수됐고, 멘셰비키 당원은 파업의 배후로 몰려 체포됐다. 1921년에 수도에서 식량 공급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와 파업이 벌어지자 시위를 금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병역을 거부한 톨스토이 지지자들은 총살됐다.
말년에 레닌이 이런 당 독재와 관료주의에 문제의식을 느껴 개혁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과장이다. 왜냐하면 레닌은 인물의 교체나 또다른 관료기구(노농감찰부)를 만들어서 관료들을 감찰하자는 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추진한 반대파의 금지, 1인경영, 민주적 선거와 권리 제한 등에 대해 레닌의 생각이 변화했다는 기록은 없다.
레닌주의와 오늘날의 좌파
이처럼 ‘레닌주의’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비판적 재평가는 상당 부분 타당하다. 정성진 교수는 레닌의 말과 글을 주로 검토했다. 그리고 이것은 필요한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레닌과 트로츠키 등이 1918년부터 1920년대 초까지 내놓은 저작과 글들은 급진좌파들 속에서 이상하게 주목받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급진좌파들이 레닌이 짜르 정부의 탄압을 피해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며 활동하던 시기나 1917년 혁명 과정에서 쓴 글을 중심으로 레닌의 사상을 평가해 왔다. 물론 이 시기에 레닌의 글과 실천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레닌이 너무나 ‘위대’해서라기보다는 그 글들에 러시아 민중들의 투쟁의 경험과 교훈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가들이 자신들을 탄압하는 기성권력을 비판하며 아래로부터 투쟁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말과 글을 내놓는 것은 그렇게 놀랍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고 책임을 지게 됐을 때, 그 이상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기존 권력자들에게 적용했던 잣대를 자기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권력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대중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이 시기에 남겨놓은 글들은 이들의 태도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이 시기 저작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큰 실질적 권한과 위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노무현의 민주화 투사 시절이나 퇴임 이후에 내놓은 좋은 말들이 아니라 집권 시기에 한 말과 행동이 중요하듯이 말이다. 나는 정성진 교수의 작업에 덧붙여 이 시기의 레닌의 말을 실천과 연결시켜 보고자 했다.
물론 일부 급진좌파들은 이러한 실천이 ‘엄혹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후퇴’였다고 레닌을 변호해 왔다. 안으로 반혁명 세력이 노동자 국가를 위협하고, 밖으로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논리가 소련, 중국, 북한 등에서 스탈린주의를 정당화한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데 있다. 30년대의 스탈린 정권처럼 엄혹한 상황을 핑계대기 좋은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좌파들은 이를 거부하고 스탈린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해 왔다. 힘겨운 상황에서 노동자 국가를 비판하거나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파업하는 것은 곧 반혁명을 돕는 것이라는 논리는 부당한 비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닌과 볼셰비키가 비슷한 논리로 반대파와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고 권력을 독점해 나간 것에 대해서 ‘엄혹하고 불가피한 상황’을 말하며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더 급진적 대안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이다.
왜 엄혹한 상황일수록 다수 대중의 집단적 지혜와 민주적 자치에 문제를 맡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는가? 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대중 스스로의 자주관리와 생산의 민주적 통제가 더 나은 답을 찾는 방법이 될 수 없는가? 결국 올바른 노선을 가진 혁명정당이 피억압 대중 스스로의 행동과 자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엘리트적 전제의 수용이 아닌가?
러시아 혁명 당시 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한 것은 볼셰비키가 ‘불가피한 후퇴’라며 채택한 징병제와 상명하복, 탈영병 총살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라는 스티브 스미스의 지적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 정부에도 불만이 많지만, 적어도 짜르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혁명적 열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게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레닌주의’에 대한 변호론이 더 문제인 것은 그것이 오늘날 일부 좌파의 사상과 실천에도 그림자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100년전 러시아 혁명에서 나타난 특정 모델을 ‘레닌주의’라고 정식화해서 반복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사실 그것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일관되게 유지한 노선이기보다 1917년 이후의 구체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레닌주의’라고 보면서 그것을 고스란히 계승하자는 좌파들이 존재한다.
그런 좌파들은 1917년 혁명도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낳은 위대한 성과로 보기보다는, 레닌이 얼마나 놀랍도록 뛰어나고 현명하게 시의적절한 전략전술을 펼쳤는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레닌이 없었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임무를 ‘레닌주의’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 여기서 이탈하는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또 ‘레닌주의’ 혁명조직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비정통’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을 계속 솎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조직은 갈수록 경직되고 열린 토론도 어려워진다. 그것은 사회와 현실의 변화에 따라 구체적인 분석을 하며 새로운 혁신을 시도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이것이 ‘사회민주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종류의 레닌주의 당’의 참모습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권력 장악 이후에 길을 잃었던 레닌과 볼셰비키를 그대로 쫓아가는 셈이 된다. 그 길은 인류해방에 대한 꿈과는 어긋나는 비극을 낳았다. 러시아 혁명의 아래로부터 요소를 환영했지만, 볼셰비키의 집권을 직접 경험하고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된 반전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이렇게 돌아본다.
"공산주의 정당은 정부 실권을 충분히 잡았다고 느끼자마자, 대중 운동의 범위들을 제한해가기 시작했다. … 새로운 독재 정부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모든 정당과 모임은 사라져야 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좌파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첫 번째 대상이었고, 그 다음은 멘셰비키와 우파에 속한 다른 정적들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갖고자 갈망했던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되었다. 모든 독립적인 단체들의 운명도 비슷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의 욕구에 복종하던지 아니면 다 같이 파괴되었다. 소비에트가 그랬고 노동조합들과 협동조합들이 그랬다. 이 세 가지는 혁명의 희망을 실현할 위대한 요소였다.”(<나의 러시아 2년>)
따라서 분명한 것은 그 길을 그대로 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917년 혁명에서 등장했던 아래로부터의 요인들을 더욱 강화·발전시키는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피억압 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만들고, 그들 자신의 자치기구에 권력이 쥐어져야 한다. 생산과 사회의 민주적이고 자주적 관리는 어떤 이유로도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린 토론도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 엄혹하고 힘든 상황일수록 이런 방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투쟁하는 대중들 속에서 듣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적 대안이 진정으로 대중적 설득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혁명가나 혁명조직도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친정부 인사와 집권당을 위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어떤 당도 현명함을 독점할 수 없고, 답을 서랍 속에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끝없는 실험과 시행착오, 토론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로자 룩셈부르크)
레닌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었고, 얼마든지 틀리고 길을 잃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짜 토론이 가능해지고 시작된다. 그 점에서 어떤 성역도 없이 과감한 이론적 혁신을 시도하는 정성진 교수의 시도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비난받을 게 아니라 발전된 토론을 위한 커다란 기여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모쪼록 이 글이 딱지붙이기나 비난, 인신공격이 아니라 생산적 토론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기사 등록 2017.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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