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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2. 4.

은림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 근처에는 이디야밖에 없었다. 학교 친구들은 석식을 먹고 나서 이디야에 갔다. 나는 카페모카에 세 번까지 샷을 추가해서 먹었다. 그러면 4000원정도 나왔던 것 같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가격과 비슷하지만 학교 근처에 스타벅스가 없었고, 어떤 커피가 맛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이디야에 갔다. 학부모들은 애들이 벌써 자기가 어른인 줄 알아서 밥 먹고 나면 커피도 한 잔씩 마신다, 고 했다. 아무도 우리 앞에서 김치녀 된장녀 운운하지 않았다. 아마 우리 학교가 여고였고, 자율고였고, 잘 사는 집 딸들이 많이 오는 학교여서 그랬을 것이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스타벅스 가면 된장녀라고 하는 얘기를 안 들은 것은 아닌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그런 프레임에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돈이 많았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이제 와서 그 애들의 말이나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거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내가 스타벅스에서 뭔가를 사먹은 건 손에 꼽는데, 대부분 시험기간에 집에서 공부하기 싫어서였다. 반면 친구들은 너무 당연하게 약속 장소를 스타벅스로 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의 삶에 스타벅스가 당연했다는 것이 놀랍다. 어떻게 그 시점 그 나이에? 지금은 그 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자본이 나와 아주 많이 차이난다는 생각을 한다.

 

또 다른 예시. 고등학교 때 내 지갑은 문구점에서 몇천 원에 파는 퀼트 지갑이었다. 개념녀 프레임 같은 것에 신경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용돈으로 살 수 있는 제일 예쁜 지갑이 그거였다. 반면 나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비싼 지갑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에서 MCM 지갑을 정가보다 싸게 팔 때 많이들 사러 가기도 했다. 싸게 판다고 해도 5만원이었고 대부분 10만원이 넘었다. 그 돈을 그 애들은 그냥 썼다. MCM이 그 정도면 싸다, 면서. 나는 브랜드가 있는 지갑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써봤다. 영국에 여행 갔을 때 사온 캐스키드슨이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 대부분이 캐스키드슨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김치녀 운운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랬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명품에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내가 뭘 사고 입는지 몰라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메갈리아가 생겼을 때, 어떤 선배들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말하거나 공부를 안 하거나 해서 나에게 조금 고통을 주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대부분 시간차를 두고 페미니즘이 급부상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갔다. 그리고 나는 (소위)‘페미니스트' 에게 (소위)’운동권'의 사고를 이해시키는 것이 운동권'에게 페미니스트'의 사고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즈음에는 세상에 내 편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트위터에서는 꿘충 욕하는 넷페미랑 싸우고 현실에서는 메갈리아에 상처받은 운동권들이랑 싸웠다. 운동권 선배들은 아무도 비하하는 의미로 너 메갈이야? 너 페미니스트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 후배들은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페미니즘이라는, 그들의 인생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모두가 나에게 뭔가를 물어봤고 나는 최대한 열심히 답해주었다. 하지만 넷페미들이 운동권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의 삶은 대체로 이랬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예수님의 은혜로 태어나서, 남동생이 있었는데도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컸다. 부모님이 남동생을 편애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 기도해서 얻은 딸인데. 여중여고를 나와서 여초과에 갔고, 운동 조직에서도 남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조직의 여자 선배들은 조직에서 연애 하는 게 낫지, 적어도 여긴 일베가 있을 리는 없잖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남자 선후배들은 대체로 제대로 된 성 인지를 가지고 있었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술마셨다. 애초에 나에게 페미니즘적인 인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형성시켜 준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운동권’ ‘남자선배였다. 그 선배는 군대 가기 직전까지 나와 함께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같은 좌파적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 그 뒤에 메갈리아 류의 피해서사, 미러링, 분리주의, 자유주의, 시스젠더-중산층-순혈-한국인 중심주의 등이 페미니즘을 대표하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페미니즘 학회를 만들었고, 그 논리에 사람들이 더 설득되지 않게 하려고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탈식민주의/3세계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2016년에 메갈리아 붐과 함께 최초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한 이후, 페미니스트보다는 운동권'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다고 말하는 지금까지 대체로 메갈리아-워마드 류의 페미니즘과 각을 세우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로나 활동가로나 성장했다.

 

내가 살면서 가장 깨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벽은 성별이 아니라 ‘(특히 NL) 운동권'에 대한 인식이었다. 가끔 내가 속한 조직을 빌미로 학내에서 마녀사냥 당하는 꿈을 꿨다.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차별이나 비가시화는 여성보다는 청소년, ‘운동권’, 바이로맨틱, 에이섹슈얼,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났다. <82년생 김지영>과는 조금 다른 삶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피해자로의 서사를 재생산하는 것에 반대한다. <82년생 김지영> 류의 서사는 기실 전혀 일반적이지도 해방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더 많은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더 많은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시스 여성 말고도, 중산층이나 대학생이나 리버럴 말고도. 피해서사 말고도.   






(기사 등록 20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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