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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돌아온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1. 19.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한국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제때에 못해서 인제 사회적 문제에 부닺친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전혀 아닙니다. 친일파, 정확히 이야기하면 식민지 시기의 토착 지배층은, 남한에서는 계속해서 그 기득권을 키워나갔을 뿐, '청산'된 게 그다지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청산'된 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친일파도 그렇지만, 친일파뿐입니까? 구한말 같으면 친일파도 당연 문제이었지만, 각종 토색질을 일삼는 민씨척족 등 세도 가문 "권귀"들의 국가 사유화 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민씨 계열의 탐관오리 중에서는 친일파 된 사람도 적지 않았죠. 예컨대 일제 강점기 경성의 최고 부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호를 받은 민영휘는 바로 가렴주구로 재산을 모은 민씨척족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조선 백성들의 원성이 하도 강해, 임오군란 때에 민영휘 집부터 방화된 것이지요.

 

그런데 구한말에 국가를 오도하고 결국 일제 식민화 정책에 굴복한 탐관오리 무리들 중에서는 '청산'이 된 경우가 과연 있는가요? 민영휘의 손자인 민병도는 이승만 시절에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그 후손들이 지금도 대한민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을 초래한 그 희대의 악정으로 유명(?)한 조병갑은요? 고종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았을 뿐이고, 그 후손들이 일제시절 친일 언론계 등에서 활약했지요. 그 증손녀인 조기숙 교수가 "증조부가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그의 가렴주구를 대놓고 변명해도 정계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과거 관련자들의 죄과에 관대(?)한 편입니다.

구한말, 일제가 그렇다고 해서, 그 뒤에 '청산'된 게 있습니까? 이승만 시대의 가장 번성했던 두 군데의 어용 재벌은 태창방직하고 삼성이었는데, 태창방직은 제1공 몰락 이후에는 쇠망의 길을 걸었지만, 삼성은 그 뒤에 승승장구해왔습니다. 1공 독재 정권과의 유착 등에 대한 '청산'''자도 꺼내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 정경유착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나 정권의 정적들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렸던 법조인들이 과연 책임다운 책임을 진 적이 있었는가요?

 

인혁당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고 '울릉도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고문을 당했을 때에 중앙정보부의 부장을 검찰총장 출신의 신직수가 맡고 있었는데, 손에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아주 많이 묻은 그는 '청산'되기는커녕 거의 죽기 전까지 자민련에서 정치질이나 편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죽고 나서는 물론 현충원에서 묻히고, 큰 사업가가 된 아이들이 그 아버지 경력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고... 그러니 친일파뿐만 아니고 구한말의 탐관오리부터 최근의 독재 정권의 형리들까지 '청산'된 게 거의 없는 것이죠. 살인마 전두환이 골프나 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곳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저는 '과거 청산 실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은 며칠 전에 박찬주의 "삼청교육대 망언"을 들었을 때입니다. 삼청교육대에 잡혀간 약 4만 명 중에서는 3분의 1은 죄과, 전과도 없는 일반인이었습니다. 전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재판절차도 없이, 변호권 실현의 기회를 주지도 않고 사람을 잡아가는 것은 명백한 국가범죄죠. 그냥 잡아간 것만도 아니고 야만적 폭력을 가해,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만 해소 수백 명에 달합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강제노동수용소와 다를 게 없는 삼청교육대에 다녀오라고 박찬주가 말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청산'의 부재입니다. 삼청교육대를 조직, 운영한 국가 범죄 주범들 중에서는 처벌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무도 없죠. 그 피해자들이 겨우 취근에 보상을 받은 것이었는데, 국가가 망가뜨린 건강과 인생을 누가 다 보상할 수 있겠어요?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것은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복수욕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틀림없이 돌아오기 때문에, 그 과거가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 청산을 해야 하는 것이죠. 민영휘와 조병갑들을 청산하지 않으면 권력 남용 부정 축재 같은 범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고, 이승만의 어용 재벌 삼성을 청산하지 않았기에 이 삼성은 인제 국가 위의 지배기관이 된 것입니다.

 

김기춘 같은 유신시대 주인공들을 청산하지 않으면 그들이 언제든지 다시 현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죠.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의 범죄에 대한 처벌이 없었기에 언젠가 다시 권력을 쟁취할 수도 있는 극우들이 또 이런 유형의 인권 유린을 충분히 범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청산은 예방 접종입니다. 이런 예방 접종을 하지 않으면 큰 일 날 수 있지요.

 

(기사 등록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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